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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 of ConstantinopleMusics : EUR 2022. 2. 8. 16:16
콘스탄디누폴리의 함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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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 :
더보기1453 년, 이 해는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한 때 새 로마 (Nova Roma, Νεα Ρομα) 라 칭해졌던 콘스탄디누폴리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 Constantinopolis) 가 함락된 해이다. 콘스탄디누폴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콘스탄디노스 11세 (Κωνσταντίνος ΙΑ' Δραγάσης Παλαιολόγος) 는 장렬히 전사했으며, 동로마 혹은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 유럽의 중세는 그 날, 사실상 종결을 고했다.
이후, 동로마, 비잔티움 제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슬람교도의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를 위시한 지중해 서부의 국가로 피신을 했고, 이들이 서유럽인들에게 가져다 준 헬레니즘 문화의 유산은 중세 서유럽인들에게 큰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I. 르네상스한 때, 서유럽에서 잊혀졌던 그리스, 로마의 헬레니즘 문화는 그렇게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인들에 의해 부활하고 재조명되었고, 종교적 분위기 일색이었던 서유럽의 문예는 종교의 속박을 걷어내고 새로운 부흥을 맞이했다.
소수의 성직자들과 학자들에게만 전래되었을 그리스 문자와 문학, 학술서들부터
이교의 신앙으로 칭해지며 철저히 배척당하고 잊혀졌던 그리스, 로마의 신들과 그들의 신화까지 대중에게 다시금 새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중의 영역으로 퍼져 나아간 그리스 문자들은 지금도 수학 기호 및 공학 계산식, 단위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널리 통용되고 있다. - 시그마는 중세 시절에는 C 비슷한 형태로 쓰여졌다. 지금은 그렇게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소문자들은 중세의 C 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보다 자유로운 문학, 자유로운 예술이 펼쳐지기 시작했으며, 경건하기만 했던 미술은 헬레니즘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 피렌체(Firenze)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음악, 미술, 문학가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도 이 때였으며, 이들의 예술은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니, 세상 사람들은 이 시대를 문예가 새롭게 부흥한 시기라 하여 '문예 부흥기',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라 칭했다.
II. 대항해 시대또한, 동로마를 거치는 해상 무역의 길이 끊긴 서유럽인들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그들의 바다였던 지중해를 떠나기 시작했으며, 이들에 의해 미지의 대륙들, 해역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전설적인 항해사들의 시대를 '대항해 시대' 라 칭한다.
- 잔혹하게도, 이것은 유럽인들에 의한 비유럽인들의 수난 시대, 그 시작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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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자유주의, 민족주의 시대1789 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그리스인들에게도 민족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오스만 제국은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 쇠퇴하고 있었으며,
술탄들 중에 개혁을 시도한 이들도 있었지만, 보수적으로 변질되고 타락한 예니체리들 (Yeniçeriler) 에 의해 저지당해 왔으며, 이들의 만행은 술탄들마저 죽이기에 이르고 있었다. 또한, 변질된 예니체리들의 전투력은 감퇴하여 유럽 각국에 의해 패배를 거듭하는 등, 국력은 점차 몰락해 가고 있었다.
결국 예니체리들은 마흐무트 2 세 (II. Mahmud) 의 강력한 결단에 의해 해체되고, 신식 군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국력을 쇄신하기 위한 움직임이 오스만 제국 내에 여러 차례 있었다. 탄지마트(Tancimat) 라 칭해지는 개혁을 비롯한 여러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되찾기에는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러한 시국에 그리스인들은 오랫동안 이어졌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떨쳐낼 기회가 왔다고 여기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독립 전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대의에는 서유럽과 러시아로 이주한 그리스인들의 후예들이 도움을 주었으며,
더 나아가, 유럽 각지에 있었던 그리스 문화 애호가들의 도움도 이어졌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찬란했던 헬레니즘, 그리스 문화를 동경했던 이들이 유럽에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사실상 유럽 전역의 도움을 받은 그리스 독립 전쟁은 그리스인들의 독립 쟁취로 끝났다. 그러나 그리스의 또 다른 염원이었을 콘스탄디누폴리의 수복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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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몰락하는 제국, 일어서는 공화국개혁을 거듭하고 있었음에도 국운이 나아지지 않던 오스만 제국은 결국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과 3 국 동맹을 체결하고, 프랑스, 영국 등의 연합군과의 전면 대결에 나서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제 1 차 세계대전' 이라 칭해질 대전쟁이었다. 대전쟁에서 동맹군은 패배하였으며,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같은 패전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 '민족자결주의' 에 의해 분할되고 말았다. - 참담하게도 이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에만 적용되었다.
여기에 그리스 왕국은 '위대한 이상 (Μεγάλη Ιδέα, 메갈리 이데아)' 를 내세우며, 오스만 제국의 남은 영토까지 노리려 하였고, 열강의 도움을 받아 아나톨리아의 여러 영토들을 정복해 나아갔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옛 동로마/비잔티온 제국 영토의 수복이 현실화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스인들이 바라는 대로만 되지 않았다.위대한 정복자였던 오스만 제국, 동로마/그리스의 영토를 손에 넣은 대제국은 그러나 국운이 다할 즈음에는 오히려 자신들이 정복했던 그리스에게 정복당할 처지에 놓이고, 그들 역시 여러 해 전의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튀르크 (터키) 독립 전쟁' 을 치르게 되었다.
전쟁의 분위기는 튀르크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무스타파 케말을 위시한 튀르크의 여러 군인들이 그리스에 정복되었던 아나톨리아의 영토를 수복하고 그리스를 압박해 갔던 것이다.
하지만 한 때,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과 함께 자신의 적이었던 오스만 제국, 튀르크를 영국은 좌시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영어 : Constantinople) 일대를 차지한 영국은 그리스를 보호하기 위해 터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로잔 조약 (Treaty of Lausanne) 에서 영국 측은 튀르크 측에게 튀르크가 차지하고 있던 영역들 중 하나를 포기할 것을 종용했으니, 하나는 '에게 (Αἰγαί-에예-, 영어 : Aegean) 바다의 섬들' 이었고, 다른 하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시한 동 트라키아 (Ανατολική Θράκη-아나톨리키 스라키-, 영어 : East Thrace)' 지역이었다. 튀르크 측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튀르크 : Konstantiniye-콘스탄티니예-) 와 동 트라키아를 택했고, 그로 인해 에게 해의 수많은 섬들 과 에게 바다의 해역 대부분을 그리스가 차지하게 되었다.
메흐메트 6 세를 폐위시키고 튀르크 공화국을 수립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이후, 콘스탄티니예라 칭해졌던 도시의 이름이 '이스탄불 (İstanbul)' 임을 천명했으며, 해당 지역을 오가는 우편물의 이름에서 '이스탄불' 이 아닌 다른 이름을 사용하지 않도록 강력히 단속했다. 이후, 이 도시의 이름은 튀르크 외의 거의 다른 나라에서도 '이스탄불' 로 칭해지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인들과 튀르크인들은 각자의 민족 국가로 (강제로) 떠나가게 되었으며, 그리스와 튀르크 지역에는 튀르크/그리스인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던 그리스인들과 튀르크인들, 그들이 남기고 남겨진 상처는 20 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에 의해 아물기는 커녕, 더욱 깊어져 가기만 했으며, 이 감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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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그리고 지금그리스하면 세상 사람들이 흔히 떠올릴 수 있을만한 곳은 어디일까, 헬레니즘 시대의 중심지였던 아테네 (Αθήνα-아시나-), 크레테/크레타 (Κρήτη-크리티-), 테바이/테베 (Θήβα-시바-). 테살로니케/테살로니카 (Θεσσαλονίκη-세살로니키-), 그리고 군사 도시로 유명했던 라케다이몬 (Λακεδαίμων-라케데몬-) 혹은 스파르테/스파르타 (Σπάρτη-스파르티-) 정도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산도리니 (Σαντορίνη), 로도스 (Ρόδος), 레즈보스 (Λέσβος) 등의 지역들을 더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생각할 이는 의외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잃은 한은 세간 사람들의 인식보다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곳이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해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들이 사실상 영원히 잃어버린 곳에 대한 미련 혹은 미망은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에 은근히 남아있는 것 같다.
지금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시한 서부 아나톨리아에 자리잡은 일부 도시들의 튀르크식 명칭-에디르네 (Edirne), 이즈미르 (İzmir), 이즈니크 (İznik), 이즈미트 (İzmit), 이스켄데룬 (İskenderun), 안타키아 (Antakya) 등- 을 그리스인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