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020 감포 여행 : 70 리 보행
    Travel 2020. 10. 4. 09:51



      양남 읍천항에서 감포항까지의 거리는 카카오맵에 의하면 걸어서 최소 22.7km 로 걸어서 5 시간 40 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어림잡아도 6 시간 정도로 9 시에 읍천항에서 출발하면 15 시 (오후 3 시) 즈음에 감포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으로 다소 여유를 가지고, 점심 식사까지 고려한다면 16 ~ 17 시 (오후 4 ~ 5 시) 즈음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후에는 밤 늦은 시간에 경주 시내로 갈 가능성까지 생각했었다.

      읍천항의 벽화 마을에서 본 벽화들 중 하나. 산뜻한 색감을 가지는 평화로운 풍경의 그림으로 시골의 한 곳에 자리잡은 커피숍 일대를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외에도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도 있었다.

     

      벽화들 중에는 민화풍의 그림도 있었으며,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풍경 한 곳에 아무리 봐도 원자력 발전소로 보이는 건물의 모습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읍천항에서 아침에 본 벽화들.

     

      양남에서 감포로 가는 첫 길목. 이 때만 해도 오래 걸리겠지만 오후 중에는 감포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조각 구름들이 무리지어 떠 있는 하늘 아래로 펼쳐진 길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바닷가를 가로질러 나아가고 싶었지만 원자력 발전소가 바닷가 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바닷길을 따라 갈 수는 없었고, 대왕암이 있는 봉남 해변으로 가기 위해서는 평지, 언덕길을 따라 나아갈 필요가 있었기에 바다 여행을 위해 나선 길이었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평지, 언덕길 여행을 이어가게 되었다.
      오랫동안 길을 걷고 있었지만 주변 풍경이 워낙 아름답다보니, 지루하지는 않았다. 도중에 코스모스 꽃들이 피어난 풍경도 볼 수 있었다. 

     

      길 도중에 마을을 지나쳐가게 되었다. 한적한 마을이었지만, 그래도 커피숍은 하나 있었다, 단 아래 층은 식당. 커피 숍 이름은 영어의 with 와 같은 뜻인 Avec. '함께' 라는 뜻을 가진다. together 도 함께라는 뜻을 가지기는 하지만 용도에만 차이가 있는 정도이니....... (에스페란토로 with 는 kun, together 는 kune)

     

      한 동안은 지도에 의지하지 않고, 그저 길을 따라 나아가기만 하였다. 어차피 큰 길을 따라 나아가다 보면 감포를 향하는 길에 이를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해 굳이 지도를 참조해 가며 길을 갈 필요는 없었던 것.

     

      길을 걸어가는 동안, 길 주변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간혹 차 한 대가 무심히 도로 위를 지나쳐 가고 있었을 따름..... 아니, 간혹 길을 지나는 도중에 아무도 없는 거처를 지키는 개들의 짖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기도 했다, 조용히 길을 걷다가도 그 짖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 때문에 화들짝 놀라고는 했다.

     

      남은 거리가 얼마나 될지는 지도를 봐야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이 나아갔을 것이며, 금방 감포를 향하는 길목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그냥 길을 따라 나아가기만 했다.

      도중에 이와 같은 풍경을 구경할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푸른색 아래로 초록색 산과 나무들이 보이고, 그 아래로 노란 들판이 펼쳐진 광경. 마치 파란 하늘과 노란 들판이 산에서 만나 산을 초록빛으로 꾸미는 듯한 느낌이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차창을 바라보며 그냥 지나쳐 갈 수 있는 풍경이겠지만 걸어가는 동안에는 그 풍경을 기억에 남길 정도로 오래 바라보며 지나칠 수 있다. 명소가 아닌 곳에도 자연미 가득한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든 있고, 걸어 다니다 보면 이런 풍경들을 놓칠 이유가 없다.
      내가 무엇보다 걸어다니는 여행을 선호하는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느낌은 이러할 것일는지. 당장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목표에 도달할 것임은 분명했기에 그것만 믿으며 눈앞에 보이는 앞길을 그냥 조용히 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 동안은 지도 앱을 살펴보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길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알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나아가지 못하였음에 실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라고 말하고 싶다.
      산길의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무렵, 길을 잘 가고 있나 싶은 생각에 지도 앱을 실행시키고 내가 위치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확인해 보니, 분명 상당한 시간 동안 걸어 나아가면서 주어진 길의 많은 부분을 지나쳐 갔다고 믿고 있었건만, 내가 위치한 지점은 1/3 정도에 불과했다. 감포에서 다소 늦은 점심 식사를 갖기로 했었는데, 이래서야 당장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는 곳부터 알아봐야 할 형편이었으니, 이를 두고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점심 식사할 곳부터 알아봐야 하겠다."

     

      비행기가 날아가며 그 궤적이 비행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에 보였다. 이러한 비행운의 존재는 이후 날씨가 맑을 징조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이후, '어일 어린이집' 이라는 건물을 지나치니, 그 건물을 지나치면서 길게 이어졌던 언덕길 보행의 시간이 끝났다. 이 어린이집은 언덕길의 한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데, 어일리 마을은 이 어린이집에서 상당히 거리를 둔 지점에 있었다. 어린이집으로 가려면 당연히 버스를 이용해야 하겠지.

    * 어일리 마을은 '마을이 작은 갤러리' 라 칭할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한다. 훗날 기회가 생긴다면 한 번 방문해 볼 생각도 있다. :)

      이정표의 꼭대기에 자리잡은 것은 주령구로 월지에서 발견된 주령구라는 이름의 주사위가 그 원형이다. 신라의 술 게임(...) 주사위가 어느새 경주의 대표적인 산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
    - 주령구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발굴 후 열처리 실수로 인해 원본을 태워 없애 버린 것이 그 원인. 그래서 현재 월지에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다.
    - 주령구를 처음 보았을 당시에는 '저렇게 술 마시고 놀았으니, 나라가 망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라고 생각했더란다.

     

      한참을 길을 따라 걸어간 끝에 문무대왕로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당연히 끝은 아니었고, 수십여 분은 더 걸어야 감은사 그리고 대왕암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발이 꽤 많이 아픈 상태였고, 그래서 발 상태가 조금은 괜찮아질 때까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이후, 문무대왕로의 길을 따라 나아간 끝에 감은사의 옛 터에 도달했다. 처음에는 늦가을 즈음에 도달해 주변 일대가 갈색 천지였었다. 다음에는 여름이나 초가을 시기에 와 보기로 했었는데, 그 시기에 맞춰 이렇게 쌍둥이 탑 구경을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찰의 흔적도 남지 않은 터에는 쌍둥이 탑들만이 남아 있었으며, 주변 일대는 벌판 아니면 논인지라 하얀 돌로 만들어진 탑의 존재가 유난하다.

      대왕암이 자리잡고 있는 봉남 해수욕장 일대. 멀리 대왕암의 모습이 보인다. 일대의 자연 바위를 이용한 것으로 그 안에 십자형 인공 수로를 만들고, 바닷물이 그 수로 일대만큼은 항상 잔잔히 흘러가도록 하였다고 한다. 수로의 수면 아래에는 거대한 돌이 덮혀 있으니, 그 아래에 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문무왕은 자신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이들을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그 유언에 따라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해를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대왕암의 위치에 그 유골을 묻었다고 전한다. 이후, 신문왕은 인근에 감은사를 짓도록 하여, 동해의 용왕으로 태어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는 배수로를 감은사 아래에 두었다고 전한다.

    * 감은사 :
      감은사는 한반도에서 당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삼한의 통일이 달성된 이후인 신문왕대에 삼한의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설된 사찰이었다.
      문무왕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는 대왕암의 해중릉에 안장되었으며, 이후, 그는 용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여기어졌다. 그래서 왕은 사찰의 금당 아래에 용혈을 파도록 하여, 동해 용왕이 된 부왕 (문무왕) 이 해류를 통해 감은사의 금당 아래에 있는 용혈과 바다를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였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동해의 용왕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의 아들로 여기어진 김유신 장군으로부터 신비스러운 호국의 피리인 만파식적이라는 보물을 얻으니, 한 번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질병과 재앙이 사라지는 영험을 가지는 대피리 (혹은 옥피리) 였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감은사 옛 터의 3 층 석탑들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3 층 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들 중에서는 가장 큰 석탑이다.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동 사리함들이 발견되기도 했었다. 이 사리함들은 현재 국립 경주 박물관과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감은사는 신라 시대에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더불어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갔지만, 지금은 쌍둥이 3 층 석탑과 절이 있었던 흔적인 건물의 옛 터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언제 어떻게 이 사찰이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으나, 고려의 무신 정권 시대 이래로 동경 민란을 비롯한 크고 작은 민란이 경주 일대에 발생했으며, 그 이후로는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가 소실되기까지 했었으니, 이러한 전란 와중에 소실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감히 해 보기도 한다.

    * 만파식적 (신라옥적) :
      실제로 만파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신라옥적' 이라 칭해진 옥피리로서,  호국의 상징으로서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이후, 고려 광종 대에 동경관을 설치하면서 동경의 동경관 내에 보관하여 이것이 조선 시대에까지 이르렀으나, 조선 초기에 동경관이 소실되면서 깨어진 후에 다시 복원되었다가 임진왜란 무렵의 화재로 인해 사라졌는데, 이후, 광해군이 옥적의 원형을 복원해 새롭게 노란 옥피리를 다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숙종 대에 동경관에서 근무하던 향리가 폭우로 무너진 담장에서 소실되었다고 알려진 옛 옥피리를 다시 발견했으며, 이 옥피리는 여러 문인들의 기록에서 자주 거론이 될 정도로 유명한 이야깃거리였으나, 막상 이 옥피리가 신라 시대의 유물이 확실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야기는 없다.
      신라옥적으로 칭해진 녹색 옥피리와 광해군 대에 이를 모조한 황색 옥피리는 현재 경주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천사옥대 :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하사를 받았다는 옥으로 장식된 요대로서 보통 사람들은 착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길었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진평왕은 매우 큰 체구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하니, 그의 체구에 맞춰 제작된 물건이었을 것이다.
      신라 삼보 중 하나로서, 대대로 서라벌의 남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고려가 삼국 통일을 완수한 그 다음 해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이었던 김부가 고려 태조에게 이 옥대를 바침으로써 고려 왕실에 귀속되었으나, 그 이후의 행방은 정사에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대왕암을 향하는 길목은 감포를 향하는 길과 갈라져 있으며, 다시 감포 쪽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나아갔던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 봉남 해수욕장의 한 곳에는 모래둑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모래둑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면 감포와 양남을 잇는 길로 돌아갈 수 있지만 굉장히 위험하다.
      모래둑 일대는 수많은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고 있어서 나름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점심 식사는 봉남 해수욕장 인근의 편의점에서 했다, 점심으로 먹은 것은 라면과 즉석밥. 요즘에는 컵라면 이외에도 라면을 직접 끓여먹을 수 있는 편의점도 있어서 참 편리하다. :)

     

      점심 식사 이후에는 앞서 언급한 모래둑을 통해 양남 - 감포를 잇는 길로 돌아가려 했지만 당연히 실패, 그 이후로 여기저기 헤매면서 발만 고생했다.

      감은사지 부근에서 감포항까지는 해안길을 따라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걸어서 대략 2 시간 정도 소요되며, 도중에 여러 해변들을 지나치게 될 것이다. 전촌 해변에 이르러 소나무 길을 지나쳐 가면 거의 다 왔다고 볼 수 있다.

     

      감포 해안길을 따라 걸어가는 동안 발의 통증이 계속 심해졌으며, 더 나아가 허벅지, 골반까지 통증이 전달되기에 이르고 있었다. 도중에 버려진 소파 하나가 있어서 잠시 소파에 앉아있기도 하였는데, 그 소파 너머로 구름이 거의 걷힌 깨끗한 하늘 아래로 바다가 물결치는 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소파는 상당히 오래 전에 버려진 물건으로 한 구석은 흙먼지로 새카맣기까지 하였지만 발이 아픈 와중에 앉을 곳은 그 곳밖에 없어서 거기 앉았다. 앉아있을 동안만큼은 여느 카페, 호텔 등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 편안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마침 바닷바람도 시원해서 카페에 있는 것이 전혀 부럽지 않을 정도.
      물론 그렇다고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고, 10 분 정도 앉아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다시 길을 재촉했다.

      나정 해수욕장의 한 곳에 자리잡은 '바다가 육지라면' 기념비. 이 노래는 경주의 향토 작가 정귀문에 의해 창작된 노래로서, 1969 년 나정리 앞 바닷가를 바라보며 지은 노래라고 한다. 그 반대편에는 감포 해수탕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나정 해수욕장 인근에는 캠핑을 위해 온 사람들이 몇 자리잡고 있었다. 저녁을 맞이하는 고요함 속에서의 나름 활기를 느낄 수 있었던 한 순간이었다.

    - - -

      양남에서 감포까지는 22.7km 라 하였지만 실제 걸은 거리는 그 이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특히 봉남 해수욕장 부근에서 많이 헤맸다) 발이 지치기를 거듭하면서 빨리 걷기도 힘들어져 자주 휴식을 취해야 했기에 실제 소요 시간 역시 더 길었다. 9 시간 즈음 걷고 나서야 감포 공설 시장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실제 걸은 거리는 대략 25 ~ 30km 정도였던 것 같다. 도착 시각은 18 시 (오후 6 시) 즈음, 경주 시내행은 무리였다.

     

      감포 공설 시장에 가자마자 바로 감포의 명물이라는 물회를 먹으러 갔었는데, 물 한 잔 제대로 마시지 못해 입이 바싹 마르기까지 했던지라 물이든 육수든 마실 때마다 너무나 시원했다.
      감포의 어느 식당에서 먹은 물회는 이전에 포항 북부시장에서 먹은 물회와 마찬가지로 시큼한 맛은 약하고 상당히 매운 맛이 강했는데, 이런 물회가 필자의 취향에는 잘 맞는 것 같다. :)

      숙박 시설에서 방을 잡고, 방에서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후유 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한 동안은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여기저기 아프고 고단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 Edited by Lysie Singcl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