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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사 기행
    Travel 2019. 10. 15. 02:48



      김제의 금산 지역은 김제의 산인 모악산의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평선' 을 내세우는 김제의 여타 지역들과 달리,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김제에서는 5, 5-1 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으며, 김제에서 금산 지역으로 가는 동안 기나긴 시골길을 지나가게 된다.
    - 금산에는 금산 터미널이 있으며, 주변 일대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금산사사적' 에 의하면 6 세기 말에 백제 법왕이 즉위하여 금산사에서 승려들이 득도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 법왕 시기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이후, 신라 경덕왕, 혜공왕 대에 진표율사에 의해 미륵신앙의 성지가 되었다고 한다. 후삼국 시대의 맹주였던 견훤이 유폐된 곳이기도 하다.
    - 드라마 '태조 왕건' 에서 금산사로 견훤이 유폐된 모습을 촬영할 시에 실제 금산사를 촬영지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 시대의 왜란으로 인해 전소되었다가, 인조대에 수문대사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이는 조선 후기의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사례로 알려지기도 했다.

      금산사의 대표 법당은 3 층 높이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륵전' 이지만, 주 법당은 '대적광전' 으로서, 옛 이름은 '대웅대적광전' 이었다가, 조선 인조대에 재건하면서 '대적광전' 으로 개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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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금산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지역 일대의 대표적인 사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그것도 나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나름 인상적이다.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테이트(Lews Boyd Tate) 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설립에는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가 협력하였다. 조덕삼과 이자익은 본래 주인과 머슴 사이로 이 교회의 설립은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 신분을 떠나 다같이 힘을 모은 역사의 사례로 여기어지고 있다.

      정문 우측에 위치한 교회 건물은 대구의 선교사 사옥과 더불어 당시 미국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알려져 있다.

     

      정문 좌측에는 ㄱ 자 모양의 전통 양식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남녀가 유별했던 한국 전통 사회의 일면에 대한 배려로 여기어질 수 있을 것이다.

      조덕삼, 이자익은 학교를 설립하면서 후진 양성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들과 그 후예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려 노력하였다고 전한다. 그 역사의 흔적들은 근방에 있는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금산사로 가는 길목. 푸른 하늘 아래로 펼쳐진 산길이 아름답다. 10 월이었지만 여전히 나뭇잎들의 색은 초록빛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그 풍경은 어떻게 변해 있을는지.

     

    길목과 나란히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 풍경은 선운사를 연상케 한다.

     

      금산사의 주 법당인 대적광전. 옛 이름은 '대웅대적광전' 이었다. 조선 후기에 재건되면서 대적광전으로 재명명된 것.

     

      육각 다층(11 층) 석탑.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봉천원 터에 있던 것을 금산사 내로 옮겨 왔다. 탑신 부분은 점판암을 깎아 만들었으며, 기단과 옥대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을 겹쳐 쌓은 듯한 외형이 인상적이지만, 이는 그 외형이 탑신들이 소실된 채로 복원되었음이 그 이유로 현재는 2 개의 탑신만 남아 있다.

     

      금산사 5 층 석탑. 다층 석탑과 마찬가지로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신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면서도 색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음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고.

     

      금산사 미륵전. 금산사의 대표적인 명소로 관광 목적으로 금산사를 방문한다면 가장 먼저 찾을 곳이 바로 이 미륵전일 것이다. 3 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불전이지만 그 내부에는 건물 높이만한 거대한 불상들을 모시고 있으며, 내부에는 층 구분이 없어서 그 형태를 3 층 목탑에 비유하는 의견도 있다.
      현재의 미륵전은 인조대에 재건한 것으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서, 금산사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사의 본당인 대적광전 앞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다. 구한말의 금산사 주지였던 '용명당 각민대사' 를 기리는 곳으로서, 금산사 부근에는 금광이 있었고, 금 채굴이 조선 말기 무렵에 일제에 의해 거행되고 있었다-이 금 채굴로 이익을 본 회사들로 현존하고 있는 기업 '미쓰비시(Mitsubishi)' 등이 있다-.
      이 채굴이 구한말 즈음에는 금산사 사리탑 아래에 이르기까지 하자, 각민대사가 불법채광의 부당성을 정부에 알리면서 법당을 수호하려 하였고, 마침내 1901 년에 불법채광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1 년 후, 채광꾼들이 다시 금산사로 모여 소란을 일으키고, 각민대사는 사내 승려들과 함께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결국에는 순교하였다.

      당시의 승려들 앞에는 총과 칼을 든 폭도들이 들이닥치고 있었고, 승려들은 그저 무력했을 것이다. 이러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야 할 것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을 목숨 바쳐 지키려 한 승려의 의지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미국의 어느 게임 회사가 벌인 '금력 앞에 굴복하여 한 게이머의 권익을 해친 사건' 을 지켜보면서 금산사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불의에 목숨 바쳐 맞서왔던 이들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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