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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격 필살, 전북 익산
    Travel 2019. 5. 7. 17:28



      익산의 옛 이름은 익주(중국에도 이런 지명이 있었다) 였으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 주라는 명칭을 변경하는 정책에 의거하여 주가 산이 되었다. 산지가 있는 지역이라서 그렇게 개명되었던 모양.
    - 예 : 인천의 옛 이름은 '인주'.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주가 천으로 대체되어 인천이 되었다.

      익산의 옛 중심지는 지금의 금마 일대였으며, 금마는 백제의 수많은 문화 유적을 내포한 유서 깊은 지역이다. 지금의 중심지는 본래 전주에 속해 있다가 익산에 편입된 곳이며, 갈대 우거진 숲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솜니' 등의 이름으로 칭해지다가 그 의역 명칭인 '이리' 로 칭해진 것이 근래까지 이어졌었다.
      익산의 중심지 일대는 이리시가 되었고, 나머지는 익산군이 되었으나, 이후, 지역들의 통합되면서 도시의 명칭은 보다 역사 깊은 명칭인 익산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백제의 문화 유적은 익산의 금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익산의 대표적인 문화 유적지인 미륵사지. 본래는 탑 하나만 놓인 터에 불과하였고, 탑 역시 무너지다 만 형태를 대충 보수한 그대로 놓여 있었으나, 무너진 탑의 표면을 보수하고, 공원을 조성하였으며, 인근에 익산 문화 박물관을 건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익산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방문해 오는 곳이 되었다.

     

      미륵사지 석탑. 탑신의 개수는 6 개이지만 무너져서 원래의 형태가 일부만 남아있어 6 층이라 칭해질 수는 없다. 본래는 9 층 석탑이었다고 하며, 그래서 복원 형태도 9 층 석탑이다.
      목탑의 형태를 모사한 석탑으로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서, 후대 석탑 건축의 원조라 칭해진다(프로토 타입). 발견 당시 높이는 14 미터 가량으로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높고 크다(경주의 분황사 석탑이 가장 거대했겠으나, 석탑이라고 말하기는 다소 미묘한 감이 있다).
      이전에는 일제 시대에 붕괴를 막기 위해 대충 시멘트로 보수한 부분이 있었으나, 미관상 흉하다고 여기어진 바 있어 결국 전면적인 보수를 단행하게 되었으며, 붕괴된 부분을 돌을 쌓아 놓는 형태로 보수를 완료하였다. 그 와중에 석탑 내부에 있던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 와중에 무왕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와중에 무왕의 왕비가 신라의 '선화 공주' 가 아니라는 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미륵사의 석등이 자리잡고 있던 터라고 한다. 석등의 형태는 불국사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등과 같은 형태인 듯하지만, 그 높이 추정치는 무려 2.7 미터.

     

      석탑 복원을 추진하면서 일대는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이렇게 연못이 조성되어 있어서 나름의 좋은 풍광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러한 미륵사지는 익산시에서 41 번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 정류장 위치는 굳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이라는 기나긴 수식어를 붙여주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익산 시내에서는 제법 가야 한다.

     

      금마면 일대. 시골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도 있고, 제법 거리가 잘 조성되어 있다. 이 일대가 관광지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익산을 방문하는 많은 이들이 찾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금마에는 터미널도 자리잡고 있으며, 익산을 비롯한 인근 지역들을 오가는 시내, 농어촌 버스를 위한 정류장 역할을 해 준다. 이 터미널을 통해 완주, 강경으로 갈 수 있다.

     

      익산 왕궁 유적지. 왕궁 유적지가 있다고 하여 왕궁리라는 지명을 얻게된 곳이지만, 거창한 이름과 달리,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음을 제외하면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백제 왕궁 터가 자리잡은 곳이라하며,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문화 박물관 내부에는 왕궁리를 비롯한 익산의 곳곳에서 출토된 백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당시의 백제 문화 수준을 어느 정도는 가늠해 볼 수 있다.

     

      백제의 말기에 해당되는 무왕 시대에도 백제는 기세가 쇠하거나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후대인 의자왕 대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합천 일대를 백제의 영토로 삼는(경남 서부 일대는 이미 백제의 영역이었다) 위엄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런 나라가 의자왕 대에 갑자기 멸망하였던 것이기에 백제 멸망의 요인에 대한 수많은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
    - 의자는 왕의 본명으로 시호를 정할 수 없었기에, 이름을 붙여 의자왕이라 칭해지는 것이다. 고구려 최후의 왕 보장왕도 마찬가지. 발해도 상황은 알 수 없으나(애초에 11 대 왕부터 시호를 알 수 없다),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부여, 금마 일대는 백제 시대에는 나름 화려한 대도시였을 것임이 분명하겠으나, 이들은 백제 멸망 이후로 역사에서 급속히 잊혀졌으며, 역사의 관심에서 배제되어 주변 도시들(논산, 익산/이리)이 이런저런 이유로 알려지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작은 지역으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 백제의 재건을 주장했던 견훤 역시 그 근거지는 지금의 나주시, 광주광역시, 전주시 일대였다.

     

      익산의 문화 예술 거리. 익산역 일대가 쇠퇴하면서 여러모로 쓸쓸한 곳이 되고 말았다. 익산에는 원광대학교가 있어서 그 일대가 가장 활발하였으며, 버스를 타고 익산역 일대로 가면서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건만, 그 일대를 지나친 것이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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